1권 창조와 족장 · 창세기 34-36장
제24장 디나와 벧엘 귀환
가나안 땅 세겜. 지금의 이스라엘 중부, 두 산 사이 골짜기에 자리 잡은 성읍이다. 형 에서와 스무 해 만에 화해한 야곱은 고향 브엘세바로 곧장 내려가지 않고, 이 성 앞의 밭을 사서 장막을 쳤다. 그 땅의 주인은 히위 족속의 우두머리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다. 야곱은 스무 해 전 도망길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시면" 그곳에 하나님의 집을 세우겠다고 서원했지만, 아직 벧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 장은 야곱, 이제 하나님께 받은 새 이름으로는 이스라엘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얍복 강에서 다친 다리를 여전히 절고 있다.
이 장의 사람들: 야곱(화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음), 디나(레아가 낳은 야곱의 외동딸), 시므온과 레위(디나의 친오빠, 레아의 아들들), 하몰(세겜 땅의 우두머리, 히위 족속), 세겜(하몰의 아들, 디나를 욕보임), 라헬(야곱이 사랑한 아내, 요셉의 어머니), 르우벤(야곱의 맏아들), 이삭(야곱의 아버지, 헤브론에 삶), 에서(야곱의 형, 에돔의 조상)
디나는 레아가 낳은 내 하나뿐인 딸이었다. 그 아이가 그 땅의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 성 안에는 또래 처녀들이 있었다. 장막에 사내 형제만 열하나인 아이였으니, 친구가 그리웠을 것이다.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땅의 우두머리 하몰의 아들 세겜이 디나를 보고 끌고 가 욕보였다. 그러고는 그 아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며, 부드러운 말로 달래며 자기 집에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에게 졸랐다. "이 여자를 제 아내로 얻어 주세요."
소식이 내게 왔다. 아들들은 들에서 가축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막 기둥을 붙잡고 서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다리를 절었고, 이 땅에서 우리는 몇 안 되는 나그네였다. 그러나 그날 내가 한 침묵을, 나는 오래 부끄러워했다.
아들들이 소식을 듣고 들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비통해했고 몹시 분노했다. 세겜이 야곱의 딸을 욕보인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몰이 나를 찾아왔다. 세겜도 함께였다.
"내 아들 세겜이 당신네 딸에게 마음이 푹 빠졌소. 그 아이를 내 아들의 아내로 주시오. 우리 서로 혼인합시다. 당신네 딸들을 우리에게 주고 우리 딸들을 데려가시오. 우리와 함께 사시오. 땅은 얼마든지 있소. 여기 머물며 장사도 하고 땅도 사시오."
세겜도 나섰다. "제발 잘 봐주십시오. 무엇을 달라 하시든 다 드리겠습니다. 신부 값이든 예물이든 아무리 많이 부르셔도 말씀대로 드릴 테니, 그 처녀만 제 아내로 주십시오."
아들들이 대답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 이상하다고 느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누이를 주는 것은 우리에게 수치입니다. 다만 당신네 남자들이 모두 우리처럼 할례를 받는다면 허락하겠습니다. 그러면 딸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 한 민족이 되겠지요. 듣지 않겠다면 우리는 우리 누이를 데리고 떠나겠습니다."
해설 할례는 남자의 몸 끝 살가죽을 베어 내는 의식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이 내 백성이라는 언약의 표"로 주신 것이다(창 17장). 하나님과 맺은 거룩한 약속의 표시를, 야곱의 아들들은 복수를 위한 속임수의 도구로 썼다.
속임수였다. 나는 그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내 아들들은 나를 닮아 있었다.
하몰과 세겜은 그 말을 좋게 여겼다. 젊은 세겜은 조금도 미루지 않았다. 그는 디나를 정말로 원했고, 집안에서 가장 존중받는 사람이었다. 둘은 성문으로 가서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 사람들은 우리와 사이좋게 지낼 사람들이오. 땅도 넓으니 여기 살면서 장사하게 합시다. 서로 혼인도 하고. 다만 우리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군. 그러면 저 사람들의 가축과 재산과 짐승이 다 우리 것이 되지 않겠소?" 성문을 드나드는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았다.
사흘째 되는 날, 그들이 아파서 꼼짝 못 할 때였다. 디나의 친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아무 경계 없는 성에 들어가 남자들을 모두 죽였다. 하몰과 세겜도 칼로 죽이고, 세겜의 집에서 디나를 데리고 나왔다. 다른 아들들은 시체가 널린 성에 들어가 약탈했다. 누이를 더럽힌 대가라고. 양과 소와 나귀, 성 안과 들판에 있던 것, 모든 재물을 빼앗고 여자와 아이들을 사로잡고 집 안의 물건까지 다 가져왔다.
나는 시므온과 레위를 불렀다.
"너희가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 이 땅에 사는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나를 역겨워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수가 적다. 그들이 힘을 모아 치면 나도 우리 집안도 다 망한다."
두 아들이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놈이 우리 누이를 창녀처럼 다뤄도 괜찮다는 겁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디나는 장막 구석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그 아이에게 묻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해설 성경은 세겜의 악행도, 시므온과 레위의 학살도 옳다고 하지 않는다. 야곱은 죽기 전 두 아들에게 "그들의 분노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창 49:5-7). 악을 악으로 갚은 일은 정의가 아니라 또 다른 죄가 되었다.
그 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거기 머물러라. 네가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칠 때 너에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그곳에서 제단을 쌓아라.
벧엘. 스무 해도 더 지난 그 서원. 나는 세겜 땅에서 너무 오래 머뭇거렸다.
나는 온 집안과 함께한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았다.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신상들을 다 버려라. 몸을 깨끗이 하고 옷을 갈아입어라. 우리는 벧엘로 올라간다. 내가 고난당할 때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내가 가는 길마다 함께하신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겠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상들을 내게 내놓았다. 귀에 걸었던 고리들도. 하란에서 따라온 것, 세겜에서 빼앗아 온 것, 오래 숨겨 두었던 것. 나는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파묻었다. 흙을 덮고 발로 다졌다.
우리가 길을 떠날 때 하나님이 주변 성읍들에 큰 두려움을 내리셨다. 아무도 우리를 쫓아오지 못했다.
우리는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렀다. 나는 거기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 "벧엘의 하나님"이라 불렀다. 형을 피해 도망칠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 곳이었다. 돌을 쌓으며 생각했다. 그때 나는 지팡이 하나였다. 지금 내 뒤에는 아내들과 아들 열하나와 딸 하나, 종들과 가축 떼가 있었다. 그분은 약속하신 것을 다 지키셨다. 나만 미루고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다. 어머니가 하란에서 시집올 때 함께 따라온 사람이었다. 그 늙은 여인의 얼굴에서 나는 늘 어머니를 보았다. 며칠만 있다 오라던 그 목소리를. 그 몸을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묻던 날 우리는 오래 울었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알론바굿, "통곡의 상수리나무"라고 불렀다.
하나님이 다시 내게 나타나 복을 주셨다.
네 이름이 야곱이지만, 이제부터는 야곱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한 민족과 여러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몸에서 나올 것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너에게 주고, 네 뒤의 자손에게도 그 땅을 주겠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와 말씀하시던 그곳에서 떠나 올라가셨다.
나는 그 자리에 돌기둥을 세웠다. 그 위에 부어 드리는 제물을 붓고, 기름을 부었다. 스무 해 전처럼. 그리고 다시 그곳을 벧엘이라 불렀다.
우리는 벧엘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에브랏까지 아직 한참 남았을 때, 라헬이 해산을 시작했다.
몹시 힘든 해산이었다. 길가에 급히 친 장막 안에서 나는 그녀의 신음을 들었다. 아이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산파가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번에도 아들이에요."
라헬은 그 말을 들었다. 요셉을 낳던 날 그녀는 하나님이 아들 하나를 더 주시기를 빌었다.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녀의 숨이 꺼져 가고 있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아이 이름을 불렀다. 베노니. "내 슬픔의 아들."
나는 그 이름을 받을 수 없었다. 이 아이가 평생 어머니를 죽인 아이로 불리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이를 베냐민이라고 불렀다. "오른손의 아들."
라헬은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다. 나는 그 무덤 위에 비석을 세웠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것을 라헬의 무덤 비석이라고 부른다. 칠 년을 며칠처럼 기다려 얻은 여자였다. 나는 그녀를 길가에 두고 떠났다.
해설 라헬이 묻힌 베들레헴은 훗날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마태복음 2장은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였을 때 "라헬이 자식을 위하여 애곡한다"는 예레미야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한다. 라헬은 자식 잃은 이스라엘 어머니들의 슬픔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 너머에 장막을 쳤다. 그곳에 머물 때 르우벤이 내 첩 빌하와 동침했다. 라헬의 여종이었던 빌하. 나는 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잊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해설 맏아들 르우벤은 장자권, 곧 집안을 잇고 두 배의 몫을 받는 맏아들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첩과 동침한 이 일 때문에 그 권리를 잃었고, 장자의 몫은 요셉의 아들들에게 넘어갔다(대상 5:1). 야곱이 죽기 전 르우벤에게 한 말(창 49:3-4)이 이 일을 다시 꺼낸다.
이렇게 내 아들은 열둘이 되었다. 레아가 낳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라헬이 낳은 요셉과 베냐민. 빌하가 낳은 단과 납달리, 실바가 낳은 갓과 아셀. 베냐민 말고는 모두 밧단아람에서 얻은 아들들이었다.
나는 마침내 헤브론,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아버지 이삭을 찾아갔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가 나그네로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앞을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털가죽 없는 내 손으로.
아버지는 그 뒤로도 여러 해를 더 사시고 백팔십 세에 숨을 거두셨다.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셨다. 형 에서와 내가 함께 아버지를 장사했다. 아버지의 축복을 두고 갈라섰던 두 아들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나란히 섰다.
형 에서, 곧 에돔의 집안도 크게 불어났다. 형은 가나안 땅에서 헷 사람 아다와 히위 사람 오홀리바마를, 또 이스마엘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얻어 아들들을 낳았고, 그 아들들에게서 여러 족장이 나왔다. 형과 나는 재산이 너무 많아 한 땅에서 같이 살 수 없었다. 형은 식구와 가축과 재물을 다 이끌고 나를 떠나 세일 산지로 옮겨 갔다. 그 땅에 원래 살던 호리 족속과 섞여 살았고, 이스라엘에 왕이 서기 훨씬 전에 에돔에는 벌써 왕들이 다스렸다. 족보표 5
형은 세일로 갔고, 나는 아버지가 나그네로 살던 이 가나안 땅에 남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 있었다. 라헬이 남긴 첫아들. 나는 그 아이를 다른 누구보다 사랑했고, 그것을 숨길 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