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창조와 족장 · 창세기 31-33장
제23장 얍복 강의 씨름
하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온 지 스무 해가 지났다. 그는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 그리고 두 여종에게서 아들 열하나와 딸 하나를 얻었고, 양과 염소를 많이 거느린 부자가 되었다. 그러자 라반과 그 아들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가나안 고향에는 스무 해 전 야곱이 속여서 축복을 빼앗은 쌍둥이 형 에서가 있다. 그때 에서는 동생을 죽이겠다고 했다. 야곱이 집으로 가려면 그 형을 지나야 한다.
이 장은 야곱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는 이제 많은 식구를 거느린 가장이지만, 형의 얼굴을 떠올리면 여전히 도망치던 그날의 젊은이다.
이 장의 사람들: 야곱(화자, 이삭의 아들, 라반 밑에서 스무 해를 일함), 라반(야곱의 외삼촌이자 장인), 레아(야곱의 첫째 아내, 라반의 맏딸), 라헬(야곱의 둘째 아내, 라반의 작은딸), 에서(야곱의 쌍둥이 형, 세일 땅에 삶), 요셉(라헬이 낳은 아들)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이 들렸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 재산을 다 가로챘어. 우리 아버지 것으로 저렇게 부자가 된 거야."
외삼촌의 얼굴도 보았다. 예전 같지 않았다. 나를 볼 때 웃지 않았다.
그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 조상의 땅, 네 친족에게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나는 사람을 보내 라헬과 레아를 양 떼가 있는 들판으로 불렀다. 장막 안에서는 말할 수 없었다. 벽에도 귀가 있었다.
"장인어른 얼굴이 나를 대하는 게 전과 다르오. 그래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소. 당신들도 알다시피 나는 힘을 다해 장인어른을 섬겼소. 그런데 그분은 나를 속이고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꿨소. 그래도 하나님이 막아 주셔서 나를 해치지 못했지. 점박이가 네 몫이라 하면 온 양 떼가 점박이를 낳았고, 줄무늬가 네 몫이라 하면 줄무늬를 낳았소. 하나님이 장인어른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신 거요."
그리고 꿈 이야기를 했다. 양들이 새끼 밸 무렵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의 천사가 나를 불렀다고.
야곱아, 눈을 들어 보아라. 암양과 짝짓는 숫양이 모두 줄무늬, 점박이, 얼룩무늬다. 라반이 너에게 한 일을 내가 다 보았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다. 너는 거기서 돌기둥에 기름을 붓고 나에게 서원했다. 이제 일어나 이 땅을 떠나 네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거라.
벧엘. 스무 해 전 돌을 베고 잠들었던 그 밤. 그분은 잊지 않으셨다.
두 아내가 함께 대답했다. 평생 처음으로 둘이 한목소리를 냈다. "아버지 집에 우리 몫이 아직 남아 있기나 한가요? 아버지는 우리를 남처럼 여기세요. 우리를 팔아넘기고 그 값까지 다 써 버리셨잖아요. 하나님이 아버지에게서 거두신 재산은 다 우리와 우리 아이들 거예요. 하나님이 하라신 대로 하세요."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멀리 간 틈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아내들을 낙타에 태우고, 밧단아람에서 모은 짐승과 재산을 다 몰고 길을 떠났다. 외삼촌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몰래 떠났다. 나는 또 도망치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라헬이 아버지 집의 드라빔을, 집안의 작은 신상들을 훔쳐 짐 속에 넣었다는 것을.
해설 드라빔은 집 안에 두던 작은 신상으로, 집안을 지켜 준다고 믿었고 상속권의 증표로 여겨졌다는 풀이도 있다. 라반이 먼 길을 쫓아온 것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야곱의 집안에 이런 우상이 섞여 들어온 일은, 뒤에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 전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명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큰 강을 건너 길르앗 산지로 향했다. 사흘 뒤에야 라반이 알았다고 한다. 그는 친척들을 이끌고 이레 길을 쫓아와 길르앗 산에서 우리를 따라잡았다.
그런데 그 전날 밤,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셨다. 라반이 나중에 내게 직접 그 말씀을 전했다.
너는 조심해라. 야곱에게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함부로 하지 마라.
나는 길르앗 산에 장막을 쳐 두었고, 라반도 친척들과 그 산에 장막을 쳤다. 그리고 내게 와서 말했다.
"어째서 나 몰래 내 딸들을 전쟁 포로처럼 끌고 갔느냐? 말만 했으면 북 치고 수금 타며 노래로 잔치를 열어 보냈을 것을. 손자들과 딸들한테 입 한번 맞출 틈도 안 주다니, 참 어리석은 짓을 했다. 내 손으로 너를 해칠 힘이 있다. 그런데 어젯밤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막으셨다. 그래, 고향이 그리워 가는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내 신들은 왜 훔쳐 갔느냐?"
나는 억울했다. "장인어른이 따님들을 억지로 빼앗을까 봐 무서워서 말없이 떠난 겁니다. 하지만 장인어른의 신이 누구한테서 나오든, 그 사람은 살려 두지 않겠습니다. 여기 친척들 앞에서 뭐든 찾아 가져가십시오."
라반은 내 장막을 뒤졌다. 레아의 장막, 두 여종의 장막도 뒤졌다. 그리고 라헬의 장막으로 들어갔다. 라헬은 낙타 안장 밑에 신상을 넣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일어나지 못해서 죄송해요. 마침 달거리 중이라서요." 라반은 장막 안을 다 더듬었지만 찾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화가 터졌다. 스무 해 동안 삼킨 말이 한꺼번에 나왔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무슨 죄가 있다고 불같이 쫓아오셨습니까? 제 살림을 다 뒤지셨는데 장인어른 것이 하나라도 나왔습니까? 있으면 여기 친척들 앞에 내놓고 판단하게 하십시오. 제가 스무 해를 모셨습니다. 장인어른 암양과 암염소가 새끼를 잃은 적이 없고, 저는 숫양 한 마리 잡아먹은 적이 없습니다. 들짐승에게 찢긴 것은 제가 물어냈고, 낮에 도둑맞은 것도 밤에 도둑맞은 것도 다 제가 물어냈습니다. 낮에는 더위에 지치고 밤에는 추위에 떨며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따님 둘을 얻으려고 열네 해, 양 떼를 얻으려고 여섯 해를 일했는데, 장인어른은 제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습니다. 제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두려워하는 그분이 저와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장인어른은 저를 빈손으로 보내셨을 겁니다. 하나님이 제 고생과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 장인어른을 꾸짖으신 겁니다."
라반은 한참 말이 없더니 어깨를 늘어뜨렸다. "딸들도 내 딸이고 아이들도 내 아이들이고 양 떼도 내 양 떼다. 네 눈에 보이는 게 다 내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내 딸들과 손자들에게 무슨 짓을 하겠느냐. 자, 우리 둘이 언약을 맺자."
나는 돌 하나를 세워 기둥으로 삼았다. 친척들은 돌을 모아 무더기를 쌓았다. 우리는 그 곁에서 함께 먹었다. 라반은 그 무더기를 자기 말로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나는 갈르엣이라 불렀다. 둘 다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이다. 미스바, "지켜보는 곳"이라고도 불렀다.
라반이 말했다.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을 때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를 지켜보시기를 바란다. 네가 내 딸들을 괴롭히거나 다른 아내를 얻으면, 보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이 증인이시다. 이 무더기와 기둥을 넘어 내가 너를 해치러 가지 않고, 너도 넘어와 나를 해치지 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이 우리 사이를 판단하시기를."
나는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그분을 두고 맹세했다. 그리고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친척들을 불러 빵을 먹였다. 그 밤은 모두 산에서 지냈다. 다음 날 새벽, 라반은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고 축복한 뒤 돌아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를 맞았다. 나는 "이곳은 하나님의 진영이다" 하고 그곳을 마하나임, "두 진영"이라 불렀다.
나는 에돔 들판 세일 땅에 있는 형에게 심부름꾼을 먼저 보냈다. "내 주인 에서께 이렇게 여쭈어라. 주인의 종 야곱이 라반 집에 머물다가 이제야 돌아옵니다. 소와 나귀, 양 떼와 종들이 있어 주인께 알려 드리오니 너그러이 받아 주십시오."
심부름꾼들이 돌아왔다. "주인의 형님께 갔더니,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맞으러 오고 계십니다."
사백 명. 그 숫자에 다리가 풀렸다. 나는 사람과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무리로 나눴다. 형이 한 무리를 치면 다른 무리라도 도망치게.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제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고향과 친족에게 돌아가라, 잘해 주겠다 하셨지요. 저는 주께서 베푸신 그 모든 사랑과 신실하심을 조금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팡이 하나 들고 이 요단 강을 건넜는데, 지금은 두 무리나 이루었습니다. 제발 형 에서의 손에서 건져 주십시오. 형이 와서 저와 아내들과 아이들까지 칠까 봐 무섭습니다. 주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잘해 주겠다고, 제 자손을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많게 해 주겠다고."
그 밤 나는 형에게 보낼 선물을 골랐다. 암염소 이백, 숫염소 스물, 암양 이백, 숫양 스물, 젖 나는 낙타 서른과 새끼들, 암소 마흔, 황소 열, 암나귀 스물, 새끼 나귀 열. 떼마다 종을 따로 붙여 사이를 띄워 보냈다. 형이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했다. "주인의 종 야곱이 형님 에서께 보내는 선물입니다. 야곱도 뒤에 옵니다." 선물로 형의 마음을 먼저 누그러뜨리고 나서 얼굴을 보면, 혹시 받아 줄지도 몰랐다.
밤중에 나는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물은 차고 빨랐다. 짐도 다 건너 보냈다. 그리고 나는 혼자 남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맞붙었다. 누군지 몰랐다. 형이 보낸 사람인지, 도둑인지. 우리는 말없이 엉켜 뒹굴었다. 자갈이 등을 긁었고 숨이 턱까지 찼다. 밤새도록 그랬다. 그는 나를 이기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내 엉덩이뼈를 쳤다. 손을 댔을 뿐인데 뼈가 어긋났다. 그때 알았다. 이건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날이 밝으려 한다. 나를 놓아라.
나는 놓지 않았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저를 축복해 주지 않으시면 놓지 않겠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발뒤꿈치를 잡는 사람. 남을 밀치고 가로채는 사람. 내 이름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것이, 평생 한 어떤 고백보다 무거웠다. 스무 해 전 아버지가 너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는 에서라고 했다.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어째서 내 이름을 묻느냐?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나를 축복했다.
해설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와 앞날이 새로 정해진다는 뜻이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처럼, "발뒤꿈치를 잡는 자" 야곱은 "하나님과 겨룬 자"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 이름은 훗날 그 자손 전체, 곧 한 민족의 이름이 된다. 하나님이 이름을 묻는 야곱에게 답하지 않으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부리거나 붙잡을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나는 그곳을 브니엘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 보았는데도 내 목숨이 붙어 있었다.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떠올랐다. 나는 다리를 절었다.
해설 그분이 야곱의 엉덩이뼈 큰 힘줄을 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은 오늘날까지 그 힘줄을 먹지 않는다. 야곱과 씨름한 분은 처음에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고백하고 호세아서 12장은 그분을 "천사"라고 부른다. 구약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런 분을 "여호와의 사자"라고 하며, 사람으로 오시기 전의 성자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으로 보는 풀이가 많다. 야곱은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다리를 다쳐 매달린 채 축복을 구하다가 이겼다.
눈을 드니 에서가 오고 있었다. 사백 명과 함께.
나는 아이들을 나누었다. 두 여종과 그 아이들을 맨 앞에, 레아와 그 아이들을 그다음에,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 레아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그 순서가 무슨 뜻인지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나는 그들보다 앞서 걸었다. 절름거리며. 형에게 다가가며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했다.
형이 달려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형은 나를 끌어안았다. 내 목을 감싸 안고 입을 맞췄다. 우리 둘은 울었다. 스무 해 동안 쌓인 것이 다 울음이 되었다.
형이 눈을 들어 여자들과 아이들을 보고 물었다. "너와 함께 온 이 사람들은 누구냐?"
"하나님이 형님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아이들입니다." 여종들과 아이들이 나와 절했고, 레아와 아이들이 절했고, 마지막으로 요셉과 라헬이 절했다.
"내가 오면서 만난 그 떼들은 다 뭐냐?"
"형님께 은혜를 입으려고 보낸 것입니다."
"동생아, 나는 넉넉하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
"아닙니다. 제발 받아 주십시오. 형님 얼굴을 뵈니 하나님 얼굴을 뵌 것 같습니다. 형님이 저를 반겨 주셨으니까요. 하나님이 제게 은혜를 베푸셔서 저도 넉넉합니다." 내가 거듭 조르자 형은 받았다.
"자, 같이 가자. 내가 앞장서마."
"형님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어리고, 양과 소가 젖먹이 새끼들을 데리고 있습니다. 하루만 무리하게 몰아도 다 죽습니다. 형님 먼저 가십시오. 저는 짐승과 아이들 걸음에 맞춰 천천히 세일로 형님께 가겠습니다."
"그럼 내 사람 몇이라도 남겨 두마."
"그러실 것 없습니다. 형님이 저를 너그러이 봐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날 형은 세일로 돌아갔다. 나는 세일로 가지 않았다. 숙곳으로 가서 집을 짓고 짐승 우리를 지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이 숙곳, "우리"가 되었다.
그 뒤 나는 밧단아람에서부터 무사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장막을 쳤다. 장막 친 땅은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백 개를 주고 샀다. 그리고 거기 제단을 쌓고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 새 이름이 들어간 첫 제단이었다.
벧엘로 가겠다던 서원은, 아직 지키지 않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