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창조와 족장 · 창세기 27장
제20장 훔친 축복
가나안 남쪽 브엘세바. 아브라함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이삭이 이제 늙어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삭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다. 먼저 태어난 에서는 털이 많은 사냥꾼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동생 야곱은 조용히 장막을 지키는 사람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다. 에서는 이미 배고픈 날 팥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동생에게 넘겼고, 가나안 땅 헷 족속의 여자 둘을 아내로 맞아 부모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들에게 빌어 주는 축복이 한 번 말해지면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장은 이삭의 아내이자 두 아들의 어머니, 리브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 장의 사람들: 리브가(화자, 이삭의 아내), 이삭(리브가의 남편, 눈이 어두워짐), 에서(맏아들, 사냥꾼, 헷 여자 둘을 아내로 둠), 야곱(작은아들, 리브가가 아낌), 라반(리브가의 오라버니, 하란에 삶)
나는 장막 휘장 뒤에서 그 말을 들었다.
남편이 에서를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그는 이제 낮에도 등잔불을 찾지 않았다. 빛이 있으나 없으나 그에게는 비슷했기 때문이다.
"얘야."
"네, 아버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네 활과 화살통을 챙겨 들에 나가서 사냥을 해 오너라.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가져와라. 그걸 먹고, 죽기 전에 내 마음을 다해 너를 축복하고 싶다."
에서의 발소리가 들뜬 채 멀어졌다. 활시위를 손가락으로 튕겨 보는 소리. 나는 휘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에서에게. 축복을 에서에게.
그 아이들이 아직 내 배 속에 있을 때가 생각났다. 배 속에서 둘이 어찌나 서로 밀치고 싸우던지, 나는 견디다 못해 여호와께 여쭈러 갔다. 이러다 내가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때 들은 말씀을 나는 한 글자도 잊지 않았다.
네 배 속에 두 나라가 들어 있다. 두 민족이 네 몸에서부터 갈라져 나올 것이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할 것이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긴다. 남편도 그 말씀을 알았다.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형을 불러 축복을 주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사냥한 고기 한 접시를 받고서.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야곱은 양 우리 옆에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장막 안으로 끌고 들어와 목소리를 낮췄다.
"방금 네 아버지가 에서한테 하는 말을 들었다. 사냥해서 요리를 해 오면 그걸 먹고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축복해 주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얘야, 이제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염소 떼에 가서 살진 새끼 염소 두 마리를 끌고 와라. 내가 그걸로 네 아버지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 테니, 네가 그걸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 그러면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축복하실 거다."
야곱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 아이는 겁을 낼 때 늘 입술부터 깨물었다.
"어머니, 형은 온몸에 털이 많잖아요. 저는 맨살이고요. 아버지가 저를 만져 보시면 어떡해요? 제가 아버지를 속이는 놈이 되잖아요. 복은커녕 저주를 받을 거예요."
"저주는 내가 받으마. 너는 내 말대로만 해. 어서 가서 가져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았다. 그래도 그 말이 입에서 나왔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눈앞에서 뒤집히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 손으로 쥐려는 조바심이었다.
해설 하나님은 동생이 형보다 앞설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경은 리브가와 야곱이 그 약속을 이루려고 눈먼 남편과 아버지를 속인 일을 옳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속임수가 없어도 이루어질 일이었다. 야곱은 이 일로 집을 떠나 오래 떠돌았고, 그 자신도 외삼촌에게 속는 아픔을 겪는다.
야곱이 새끼 염소 두 마리를 끌고 왔다. 나는 칼을 들었다. 남편의 입맛은 평생 맞춰 온 것이었다. 들짐승 고기와 염소 고기의 차이를 어떻게 덮는지, 무슨 풀을 얼마나 넣고 얼마나 오래 끓여야 하는지 나는 알았다. 손은 빨랐고 마음은 더 빨랐다. 에서가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고기가 끓는 동안 나는 장막 안쪽에 넣어 둔 에서의 좋은 옷을 꺼냈다. 들판 냄새, 풀과 흙과 짐승의 냄새가 배어 있는 옷이었다. 그걸 야곱에게 입혔다. 그리고 염소 새끼의 가죽을 벗겨 그 아이의 손등과 매끈한 목에 감아 묶었다. 거친 털이 야곱의 살에 닿자 그 아이가 몸을 움찔했다.
나는 요리와 갓 구운 빵을 야곱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릇이 조금 떨렸다. 나도, 그 아이도 떨고 있었다.
나는 휘장 뒤로 돌아가 숨을 죽였다.
"아버지."
"그래, 여기 있다. 얘야, 너는 누구냐?"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했습니다.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한 고기를 드시고 마음껏 저를 축복해 주세요."
내 아들이 제 입으로 형의 이름을 대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얘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잡았느냐?"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일이 잘 풀리게 해 주셨어요."
나는 눈을 감았다. 하나님의 이름까지. 그 거짓말에 하나님의 이름까지 끌어다 붙였다.
"얘야, 이리 가까이 오너라.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서인지 한번 만져 보자."
휘장 틈으로 남편의 손이 야곱의 손등을 더듬는 것이 보였다. 손가락이 염소 털 위에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은 에서로구나."
그 한마디에 내 숨이 멎었다. 남편은 한참 그 손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서냐?"
"네, 그렇습니다."
"가져오너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마음껏 너를 축복하겠다."
남편은 먹었다. 야곱이 포도주를 따라 드리자 그것도 마셨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얘야, 가까이 와서 입 맞춰 다오."
야곱이 몸을 숙였다. 남편이 그 옷에 코를 묻었다. 에서의 옷. 들판의 냄새. 남편의 얼굴이 풀어졌다.
"내 아들의 냄새는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신 밭의 냄새로구나. 하나님이 하늘의 이슬과 기름진 땅을 너에게 주시고, 곡식과 포도주를 넉넉히 주시기를 바란다. 여러 민족이 너를 섬기고 나라들이 네 앞에 엎드리기를 바란다. 네가 형제들의 주인이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엎드리기를 바란다.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사람은 복을 받기를 바란다."
끝났다. 말해졌다. 나는 휘장을 붙잡고 서 있었다. 기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해설 그 시대에 아버지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빌어 주는 축복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한 말이라 한 번 말하면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히브리서 11장은 이삭이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에게 앞일을 축복했다고 말한다. 이삭은 속아서 축복했지만, 그 축복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말씀하신 대로 동생에게 돌아갔다.
야곱이 아버지 앞에서 물러나 장막 밖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들판 쪽에서 에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는 사냥한 짐승을 어깨에 메고 들어왔다. 피 냄새와 땀 냄새가 함께 들어왔다.
에서는 서둘러 요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가져갔다.
"아버지, 일어나셔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드시고 마음껏 저를 축복해 주세요."
"너는 누구냐?"
"저요, 아버지 아들이요. 맏아들 에서요."
그때 남편이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떠는 것을 평생 처음 보았다. 모리아 산에서 칼 아래 누웠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가져온 그 사람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그걸 다 먹고 그에게 축복했다. 그러니 그가 정말로 복을 받을 것이다."
에서가 소리를 질렀다. 울음이었다. 다 큰 사내가, 아내가 둘이나 있는 사내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아버지, 저도요. 저도 축복해 주세요."
"네 동생이 와서 속이고 네 복을 가져가 버렸다."
"그러니까 이름이 야곱이지요. 발뒤꿈치를 잡는 놈. 벌써 두 번째예요. 전에는 맏아들 권리를 빼앗더니 이제는 제 복까지 빼앗았어요." 에서는 숨을 몰아쉬었다. "저를 위해 남겨 두신 복은 하나도 없으세요?"
"내가 그를 네 주인으로 세웠다. 모든 형제를 그의 종으로 주었고, 곡식과 포도주도 그에게 주었다. 얘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더 해 줄 수 있겠느냐?"
"아버지께 복이 그거 하나뿐이에요? 아버지, 저도 축복해 주세요. 저도요."
에서는 소리 높여 울었다. 나는 휘장 뒤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저 아이도 내 배에서 나왔다. 내가 먼저 안아 본 아이가 저 아이였다. 붉은 털이 온몸을 덮은 채 세상에 나와 우렁차게 울던.
남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사는 곳은 기름진 땅에서 멀고, 위에서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도 멀 것이다. 너는 칼에 기대어 살 것이고, 동생을 섬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몸부림쳐 벗어나는 날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릴 것이다."
해설 이삭이 에서에게 한 말도 그대로 이루어졌다. 에서의 자손 에돔은 사해 남쪽의 메마른 산지에 살았고, 다윗 왕 때부터 이스라엘의 다스림을 받다가 유다 왕 여호람 때 들고일어나 벗어났다(왕하 8:20-22). 히브리서 12장은 에서가 울며 복을 구했어도 되돌릴 길을 얻지 못했다고 적는다.
그날 이후 에서는 야곱을 보지 않았다. 보면 눈으로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 아이가 속으로 품은 말이 어떻게든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아버지 장례 치를 날도 머지않았다. 그날이 지나면 야곱을 죽여 버리겠다.
나는 다시 야곱을 불렀다.
"네 형이 너를 죽여서 분을 풀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러니 얘야, 내 말을 들어. 지금 바로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몸을 피해라. 형의 화가 풀릴 때까지 며칠만 거기 있어. 형이 네가 한 일을 잊고 분이 가라앉으면 내가 사람을 보내 너를 데려오마. 내가 어떻게 하루에 너희 둘을 다 잃겠니."
며칠. 나는 며칠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얼마나 가벼운 말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나는 남편에게 갔다. 야곱을 하란에 보내자는 말을 그에게서 나오게 해야 했다. 에서의 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오래 쌓인 다른 진심을 꺼냈다.
"저 헷 여자들 때문에 내가 사는 게 지긋지긋해요. 야곱까지 이 땅 여자들, 저런 헷 여자 중에서 아내를 얻으면 내가 무슨 낙으로 살겠어요."
남편은 보이지 않는 눈을 내 쪽으로 돌린 채 오래 말이 없었다.
그날 저녁, 나는 야곱이 길에서 먹을 것을 싸서 짐 꾸러미를 묶었다. 매듭을 짓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이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보려면 며칠이면 될 거라고, 나는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