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창조와 족장 · 창세기 25-26장

제19장 팥죽 한 그릇

가나안 땅 남쪽 네겝.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먼 북쪽 하란 땅에서 리브가를 데려와, 이삭과 혼인한 뒤의 일이다. 어머니 사라는 이미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묻혔다. 이제 아버지 아브라함도 아주 늙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넘어가려 하고 있다.

이 장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리브가와 혼인할 때 마흔 살이었고, 이 장에서 그는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다.

이 장의 사람들: 이삭(화자, 아브라함의 아들), 리브가(이삭의 아내), 아브라함(이삭의 아버지, 이 장에서 세상을 떠남), 이스마엘(이삭의 이복형), 그두라(아브라함의 후처), 에서(이삭의 맏아들, 사냥꾼), 야곱(에서의 쌍둥이 동생), 아비멜렉(그랄의 블레셋 왕)

아버지는 백일흔다섯 해를 사셨다.

어머니가 떠나신 뒤 아버지는 그두라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 나는 그 일을 탓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두라에게서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여섯 아들을 얻었다. 아버지는 살아 계실 때 그 아들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고 나에게서 떨어진 동쪽 땅으로 보냈다. 그리고 가진 모든 것을 나에게 주셨다. 약속의 아들은 하나라는 것을, 아버지는 끝까지 흐리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오래 사셨고, 만족한 삶을 사셨다. 마지막 숨을 쉬고, 먼저 간 조상들에게로 돌아가셨다.

장례 날 형 이스마엘이 왔다. 광야의 바람에 그을린 얼굴이었다. 우리는 몇십 년 만에 마주 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둘 다 말하지 않았다. 둘이 함께 아버지를 들어,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모셨다. 아버지가 헷 사람에게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산 그 밭의 굴이다. 아버지는 거기서 어머니 곁에 누우셨다.

형은 장례를 마치고 광야로 돌아갔다. 형에게서는 열두 아들이 났고, 하나님이 아버지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열두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형은 백서른일곱 해를 살고 숨을 거두었다. 그 자손은 하윌라에서 애굽 동쪽 술까지, 앗수르로 가는 길목에 퍼져 살며 형제들과 마주 보고 지냈다. 족보표 4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셨다. 나는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살았다. 오래전 하갈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살아 계셔서 나를 보시는 분의 우물이라는 곳이었다.


이제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던 때로 돌아가 말하겠다. 혼인한 뒤로 리브가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

한 해, 두 해. 열 해가 넘어갔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도 그렇게 기다렸다. 아버지도. 약속을 받은 집안인데 장막은 늘 비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나는 아내를 위해 여호와께 빌었다.

여호와께서 들으셨다. 스무 해 만에 리브가가 아이를 가졌다.

그런데 아내가 편치 않았다. 배 속의 아이들이 서로 밀치며 싸웠다. 아내는 밤마다 배를 움켜쥐고 앉아 있었다. "이럴 거면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아내는 여호와께 물으러 갔다. 돌아온 아내가 들은 말씀을 내게 전했다.

두 나라가 네 배 속에 있다. 네 몸에서 나오는 두 민족이 서로 갈라질 것이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할 것이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긴다. 나는 그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오래, 그 말씀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았다.

해설 바울은 이 말씀을 들어, 하나님이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동생 야곱을 택하셨다고 말한다(롬 9:10-13). 하나님의 택하심은 사람의 행위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해산할 날이 되었다. 쌍둥이였다.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고 온몸이 털옷을 두른 듯 털투성이였다. 우리는 그를 에서라 불렀다. 뒤이어 동생이 나왔는데, 손으로 형의 발꿈치를 꽉 쥐고 있었다. 그래서 야곱, 발꿈치를 잡은 자라 불렀다. 그때 나는 예순 살이었다. 아버지는 그 뒤로도 열다섯 해를 더 사셔서 두 손자가 자라는 것을 보셨다.


아이들이 자랐다.

에서는 솜씨 좋은 사냥꾼이 되었다. 새벽에 활을 메고 나가 저녁에 짐승을 메고 돌아왔다. 그가 구운 고기 냄새가 장막에 퍼지면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났다. 나는 그 고기를 좋아했고, 그래서 에서를 더 아꼈다.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장막 곁에 머물며 어머니 일을 거들었다. 리브가는 야곱을 더 아꼈다.

부모가 자식 하나씩을 나누어 가진 셈이었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랐다.

어느 날 야곱이 장막 앞에서 죽을 쑤고 있었다. 붉은 팥죽이었다. 에서가 들에서 돌아왔다. 기진맥진한 얼굴이었다.

"배고파 죽겠다. 그 붉은 거, 그 붉은 거 좀 먹자."

그 일로 에서는 에돔, 붉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야곱이 국자를 내려놓지 않고 말했다. "형의 맏아들 권리를 오늘 나한테 팔아."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맏아들 권리가 무슨 소용이야."

"오늘 맹세해."

에서는 맹세했다. 아버지 재산에서 더 큰 몫을 받을 권리와 집안의 대표 자리, 하나님의 약속을 잇는 맏아들의 몫을 팥죽 한 그릇에 넘겼다. 야곱이 빵과 팥죽을 주었다. 에서는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가 버렸다. 맏아들의 권리를 그렇게 가볍게 여긴 것이다.

해설 맏아들의 권리(장자권)는 맏아들이 아버지 재산에서 다른 형제보다 두 배 몫을 받고 아버지를 이어 집안을 이끄는 권리다(신 21:17). 이 집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잇는 자리이기도 했다. 히브리서 12장은 음식 한 그릇에 이것을 판 에서를 "속된 사람"이라 부르며,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경고한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빌어 주는 "축복"은 이것과 따로 주어지는 것으로, 다음 장에 나온다.

나는 이 이야기를 오래 뒤에 들었다. 들었을 때, 나는 에서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야곱에게 화가 났다. 그게 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 때처럼 그 땅에 또 흉년이 들었다.

나는 식구와 가축을 이끌고 그랄로 갔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거기서 더 내려가면 애굽이었다. 다들 흉년이면 애굽으로 갔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때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마라. 내가 너에게 말하는 땅에서 살아라. 이 땅에 머물러 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복을 주겠다.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겠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내 말에 순종하고, 내가 맡긴 일과 내 명령과 규례와 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해설 "아브라함이 내 말에 순종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복을 얻어 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하기 전에 은혜로 주어졌고,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창 15:6). 그의 순종은 그 믿음에서 자라난 열매였고, 하나님은 그 열매를 기뻐하시며 약속을 아들에게 이어 주셨다.

나는 그랄에 머물렀다.

그리고 아버지가 했던 일을 똑같이 했다. 그곳 사람들이 아내에 대해 묻자 "내 누이요"라고 했다. 리브가는 아름다웠다. 아내라고 하면 저들이 아내를 빼앗으려 나를 죽일 것 같았다. 하나님이 함께하겠다고 하신 바로 그 땅에서, 나는 두려웠다.

꽤 오래 그렇게 지냈다. 어느 날 내가 리브가를 끌어안고 웃고 있었는데, 아비멜렉 왕이 창문으로 그걸 내려다보았다.

왕이 나를 불렀다. "그 여자는 분명 당신 아내요. 그런데 어째서 누이라고 했소?"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죽게 될까 봐 그랬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 있소? 백성 가운데 누가 하마터면 당신 아내를 건드릴 뻔했소. 그랬다면 당신이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셈이오." 그리고 왕은 온 백성에게 명령했다. "이 사람이나 그 아내를 건드리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버지가 이 땅에서 똑같은 망신을 당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그랬다.


그해 나는 그 땅에 씨를 뿌려 백 배를 거두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 나는 점점 부자가 되었다. 양 떼와 소 떼가 늘고 종들이 많아졌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시기했다. 그들은 아버지 때 아버지의 종들이 판 우물들을 모조리 흙으로 메웠다.

아비멜렉이 말했다. "당신은 우리보다 너무 강해졌으니 우리를 떠나시오."

나는 떠났다. 그랄 골짜기로 옮겨 장막을 쳤다. 그리고 아버지 때 팠다가 메워진 우물들을 다시 팠다. 이름도 아버지가 부르던 그대로 붙였다. 흙을 퍼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 종들이 골짜기에서 우물을 파다 솟아나는 샘을 찾았다. 그러자 그랄 목자들이 몰려와 "이 물은 우리 거다" 하며 다투었다. 나는 그 우물을 에섹, 다툼이라 부르고 물러났다. 또 하나를 팠다. 또 다투었다. 그 우물은 싯나, 미움이라 불렀다. 나는 또 물러났다. 조금 더 가서 또 팠다. 이번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르호봇이다.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 자리를 넓혀 주셨으니 우리가 이 땅에서 번성하겠다."

싸우지 않고 물러나기만 했는데, 마지막에 넓은 자리가 남았다.

해설 메마른 땅에서 우물은 생명줄이었고, 우물을 판다는 것은 그 땅에 뿌리내려 산다는 뜻이었다. 이삭은 아버지가 판 우물을 다시 파고 같은 이름을 붙여, 아버지가 받은 약속을 자기가 이어받았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투는 대신 물러나며 하나님이 자리를 넓혀 주시기를 기다렸다.


나는 거기서 브엘세바로 올라갔다. 그날 밤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다.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종 아브라함을 보아서 너에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분은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랄에서도, 우물가에서도. 나는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장막을 쳤다. 종들은 거기서도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뒤 아비멜렉이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을 데리고 그랄에서 찾아왔다.

"당신들은 나를 미워해서 쫓아내더니 왜 왔소?"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계신 것을 우리가 똑똑히 보았소. 그래서 우리와 당신 사이에 맹세를 하고 언약을 맺고 싶소. 우리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고 좋은 일만 하고 평안히 보내 주었듯, 당신도 우리를 해치지 마시오. 당신은 여호와께 복 받은 사람이오."

나는 잔치를 열었다. 그들은 먹고 마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로 맹세했고, 나는 그들을 평안히 보냈다.

바로 그날 종들이 달려왔다. "물이 나왔습니다!" 나는 그 우물을 세바, 맹세라 불렀다. 그래서 그 성의 이름이 지금도 브엘세바다. 아버지가 맹세하던 바로 그 땅에서, 나도 맹세했다.


그 무렵 에서가 마흔 살에 아내를 얻었다. 헷 사람 브에리의 딸 유딧, 그리고 헷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 둘 다 이 땅의 여자였다. 아버지가 늙은 종에게 맹세까지 시키며 피하려던 바로 그 일이었다.

두 며느리는 리브가와 내 마음을 오래 아프게 했다. 그래도 나는 에서를 사랑했다. 내 눈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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