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창조와 족장 · 창세기 23-24장

제18장 막벨라 굴과 리브가

가나안 땅 헤브론, 옛 이름으로 기럇아르바. 모리아 산의 일이 있고 여러 해가 흘렀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백스물일곱 해를 살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 땅 전부를 약속받았지만, 정작 그의 이름으로 된 땅은 한 뼘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이 땅에 사는 헷 사람들 사이의 나그네였다.

이 장은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살림을 맡은 늙은 종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성경은 이 장에서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오래전 아브라함이 "제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입니다"라고 말한 그 사람으로 흔히 본다.

이 장의 사람들: 늙은 종(화자, 아브라함 집의 살림을 맡은 종), 아브라함(주인님), 사라(마님, 이 장에서 세상을 떠남), 이삭(도련님, 아브라함의 아들), 에브론(헷 사람 소할의 아들, 막벨라 밭 주인), 리브가(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 브두엘의 딸), 라반(리브가의 오라비), 브두엘(리브가의 아버지)

마님이 돌아가신 날, 나는 주인님이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장막 안에서 주인님은 오래 나오지 않았다. 마님 곁에 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백 살이 훨씬 넘은 사람의 울음은 낮고 길었다. 나는 장막 밖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서 있었다. 들어갈 수 없었다. 종이 들어갈 자리가 아니었다.

이윽고 주인님이 일어나 나왔다. 얼굴을 씻지도 않았다. 그 길로 성문에 앉은 헷 사람들에게 갔다. 나는 뒤를 따랐다.

"나는 여러분 사이에 사는 나그네입니다. 여러분 땅에 묘지 하나를 내 것으로 갖게 해 주십시오. 내 죽은 아내를 장사 지내야 합니다."

헷 사람들이 대답했다. "어르신, 들어 보십시오. 어르신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세우신 큰 어른이십니다. 우리 묘지 가운데 제일 좋은 곳을 골라 장사 지내십시오. 자기 묘지를 내드리지 않을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정중한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알았다. 그 말대로 하면 마님은 남의 무덤에 눕는다. 주인님도 알았다. 주인님은 일어나 그 땅 사람들에게 허리를 굽혔다.

"내가 아내를 장사 지내는 것이 여러분 뜻이라면,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말을 넣어 주십시오. 그의 밭 끝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넘겨 달라고. 값은 제대로 다 치르겠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내 묘지로 삼게 해 주십시오."

에브론은 마침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가 성문에 모인 모든 사람이 듣도록 말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그 밭을 드리겠습니다. 굴도 드리겠습니다. 내 동족이 보는 앞에서 드리니 장사 지내십시오."

주인님은 다시 허리를 굽혔다.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 주시오. 밭값을 내겠소. 받아 주시오. 그래야 내가 거기 장사 지내겠소."

"어르신, 땅값이야 은 사백 세겔이지만, 우리 사이에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장사나 지내십시오."

사백 세겔. 거저 준다면서 값을 꺼냈다. 그것도 큰 값이었다. 나는 주인님을 보았다. 주인님은 흥정하지 않았다. 상인들이 쓰는 은으로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 앞에 내놓았다. 저울이 기울 때 은이 짤랑거렸다.

그렇게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이, 그 안의 굴과 둘레의 나무까지 모두, 성문에 모인 헷 사람들 앞에서 주인님 소유가 되었다. 주인님은 그 굴에 마님을 장사 지냈다.

약속의 땅에서 주인님이 처음으로 가진 땅은 무덤이었다. 나는 굴 입구를 막는 돌을 굴리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믿는구나. 언젠가 이 땅이 다 자손의 것이 된다고. 그래서 여기 묻는구나.

해설 그 시대에는 땅을 사고팔 때 성문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값을 치러 증인을 세웠다. 아브라함이 거저 받지 않고 값을 다 치른 것은 이 굴이 누구도 따질 수 없는 자기 땅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막벨라 굴에는 훗날 아브라함,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도 묻힌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들이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어도 멀리서 보고 반기며 더 나은 본향을 바랐다고 말한다.


주인님은 나이가 아주 많았다. 여호와께서 모든 일에 주인님께 복을 주셨다. 그런데 아들 이삭은 아직 혼자였다. 마님을 잃은 뒤로 더 말이 없어졌다.

어느 날 주인님이 나를 불렀다.

"네 손을 내 허벅지 밑에 넣어라.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이름으로 맹세해라. 내가 사는 이 가나안 사람들의 딸 가운데서 내 아들의 아내를 고르지 않겠다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 가서 이삭의 아내를 데려오겠다고."

나는 손을 넣기 전에 물었다. "그 여자가 저를 따라 이 땅으로 오지 않겠다고 하면요? 도련님을 주인님 고향으로 모시고 가야 합니까?"

"절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려가지 마라." 주인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아버지 집과 고향에서 데리고 나오셨다. 나에게 맹세하시며 이 땅을 내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셨다. 그분이 천사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 것이다. 너는 거기서 내 아들의 아내를 데려와라. 그 여자가 따라오지 않겠다고 하면 너는 이 맹세에서 풀린다. 다만 내 아들은 절대 그리로 데려가지 마라."

나는 주인님 허벅지 밑에 손을 넣고 맹세했다.

해설 허벅지 밑에 손을 넣는 것은 그 시대에 가장 엄숙한 맹세를 할 때 하던 몸짓이다. 자손이 나오는 몸에 손을 대고 맹세해 그 약속이 후손 대대로 걸린 일임을 나타냈다는 풀이가 많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여자를 며느리로 삼지 않으려 한 것은 그 땅의 우상 숭배가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삭을 고향으로 데려가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이 땅을 떠나지 않으려는 믿음이었다.


낙타 열 마리에 주인님의 좋은 것들을 실었다. 메소포타미아로, 주인님 동생 나홀이 사는 성으로 떠났다. 길은 멀었다. 낙타 등에서 나는 내내 생각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찾아, 본 적도 없는 신랑에게 데려가야 한다. 그 여자가 왜 나를 따라오겠나.

저녁 무렵 성에 닿았다. 성 밖 우물 곁에 낙타들을 꿇어앉혔다. 여자들이 물 길으러 나올 시간이었다.

나는 기도했다. 평생 주인님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보기만 했지, 내 입으로 그렇게 길게 아뢴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 일이 잘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가 이 우물 곁에 서 있겠습니다. 성 안 처녀들이 물을 길으러 나옵니다. 제가 한 처녀에게 '물동이를 기울여 물 좀 주시오' 할 때, 그 처녀가 '드세요. 낙타들에게도 물을 드릴게요' 하면, 그 처녀가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해 정하신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낙타 열 마리. 먼 길을 온 낙타는 한 마리가 큰 물동이로 몇 번씩을 마신다. 그걸 다 길어 주겠다고 말할 처녀가 있을까. 나는 일부러 그런 표를 구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 처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왔다. 아주 아름다웠다. 아직 남자를 모르는 처녀였다. 그녀는 우물로 내려가 물동이를 채워 올라왔다. 나는 달려가 마주 섰다.

"물동이의 물을 조금만 마시게 해 주시오."

"드세요, 어르신." 그녀는 서둘러 물동이를 손에 내려 내게 기울였다. 내가 다 마시자 그녀가 말했다. "낙타들도 실컷 마시도록 물을 길어 드릴게요."

그녀는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쏟고 다시 우물로 달려갔다. 또 달려갔다. 또.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여호와께서 정말 내 길을 열어 주신 것인지 끝까지 보려고.

낙타들이 다 마셨다. 나는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하나와 열 세겔 무게의 금팔찌 한 쌍을 꺼냈다.

"누구의 딸이오? 아버지 집에 우리가 묵을 자리가 있겠소?"

"저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에요. 우리 집에 짚과 먹이도 넉넉하고 묵을 곳도 있어요."

나홀. 주인님의 동생. 나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엎드렸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주께서 우리 주인에게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하심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길에서 이끄셔서 주인님 친족의 집으로 바로 오게 하셨습니다."

해설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하심"은 하나님이 한 번 맺은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는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다(히브리 말로 "헤세드"). 이 종은 우연처럼 보이는 일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아보고 먼저 엎드려 감사했다.


처녀는 리브가였다. 그녀가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 집 사람들에게 이 일을 전했다. 곧 오라비 라반이 우물로 달려 나왔다. 누이 코에 걸린 금과 손목의 팔찌를 본 뒤였다.

"여호와께 복 받은 분, 들어오십시오. 왜 밖에 서 계십니까? 방도 마련했고 낙타 둘 곳도 마련했습니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갔다. 라반이 낙타 짐을 풀고 짚과 먹이를 주었다. 나와 동행한 사람들의 발 씻을 물이 나왔다. 음식 상이 차려졌다.

"제 일을 말씀드리기 전에는 먹지 않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나는 모든 것을 말했다.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라는 것. 여호와께서 주인님께 양과 소, 은과 금, 종들, 낙타와 나귀를 주셔서 크게 부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 마님이 늙어서 아들을 낳았고 주인님이 모든 것을 그 아들에게 주었다는 것. 주인님이 나에게 시킨 맹세, 내가 우물가에서 드린 기도, 그리고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메고 나온 일까지. 하나도 빼지 않았다. 말하면서 나도 다시 놀랐다.

"이제 여러분이 우리 주인을 진심으로 대해 주시려면 그렇다고 말해 주십시오.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해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어느 쪽으로든 가겠습니다."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했다. "이 일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일이니 우리가 좋다 나쁘다 할 수 없소. 리브가가 여기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당신 주인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시오."

나는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했다. 그리고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옷을 꺼내 리브가에게 주었다. 오라비와 어머니에게도 귀한 선물을 주었다. 그제야 우리는 먹고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말했다. "이제 저를 주인님께 돌려보내 주십시오."

오라비와 어머니가 말했다. "아이를 며칠만, 열흘만이라도 더 우리와 있게 해 주시오. 그다음에 가도 되지 않소."

"붙잡지 마십시오. 여호와께서 제 길을 열어 주셨으니 주인님께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그럼 아이를 불러 직접 물어봅시다."

그들이 리브가를 불렀다. "이 사람과 같이 가겠느냐?"

리브가가 대답했다. "가겠어요."

한마디였다.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 이 처녀는 주인님을 닮았다. 오래전 하나님 말씀 하나에 고향을 떠난 그 사람을.

그들은 리브가와 그녀의 유모를 우리와 함께 보내며 축복했다. "우리 누이야, 너는 천만 사람의 어머니가 되어라. 네 자손이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게 되어라." 리브가는 몸종들과 함께 낙타에 올라 나를 따라왔다.


돌아오는 길, 남쪽 네겝 땅에 이르렀다. 그 무렵 도련님은 브엘라해로이 쪽에서 와서 남쪽에 머물고 있었다.

해가 기울 때였다. 들판에 한 사람이 걷고 있었다. 도련님이었다. 저물녘 들에 나가 홀로 묵상하던 참이었다. 그가 눈을 들어 낙타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리브가도 눈을 들었다. 그녀는 낙타에서 내렸다. "저기 들판에서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분이 누구세요?"

"제 주인이십니다."

리브가는 너울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나는 도련님께 내가 한 일을 처음부터 다 아뢰었다. 도련님은 리브가를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녀를 아내로 맞아 사랑했다. 마님을 잃은 뒤 한 번도 펴지지 않던 도련님 얼굴이 그날 저녁 처음 풀렸다. 어머니를 여읜 슬픔에서 도련님은 그렇게 위로를 얻었다.

나는 빈 낙타들을 끌고 우리로 갔다. 맹세는 다 이루어졌다. 주인님은 그 뒤로도 여러 해를 더 사셨고, 그 장막에는 아직 들려줄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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