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창조와 족장 · 창세기 20-21장
제16장 웃음, 이삭
소돔과 고모라가 불탄 뒤, 아브라함 일행은 마므레를 떠나 더 남쪽으로 내려간다.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그랄이라는 땅이다. 지금의 이스라엘 남부, 가자 지구 근처로 보인다. 바로 얼마 전 하나님은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다.
이 장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때 그녀는 아흔 살이다.
이 장의 사람들: 사라(화자, 아브라함의 아내), 아브라함(사라의 남편이자 이복 오라버니), 아비멜렉(그랄 왕), 이삭(사라가 낳은 아들), 하갈(사라의 애굽 여종), 이스마엘(하갈이 낳은 아브라함의 아들), 비골(아비멜렉의 군대 장관)
나는 아흔 살에 또 누이가 되었다.
그랄에 들어서면서 남편이 말했다. 오래전 애굽에서 했던 그 말을. 이 사람은 내 누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란을 떠날 때부터 둘이 정한 일이었다. 가는 곳마다 나를 오라버니라고 불러 달라고, 그게 나에게 베풀 은혜라고 그가 말했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르다. 반만 거짓말이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 나를 데려갔다.
왕궁의 방은 넓었고 향 냄새가 났다. 나는 거기 앉아 생각했다. 나는 내년이면 아들을 낳을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지금 남의 집에 있다.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가 되나. 손끝이 차가워졌다. 남편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고서도 또 이렇게 했고, 나도 또 따랐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들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셨다고 한다.
네가 데려온 이 여자 때문에 너는 죽을 것이다. 그는 남의 아내다.
아비멜렉은 아직 나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가 대답했다. "주여, 의로운 백성까지 멸하시렵니까? 그 남자가 직접 자기 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여자도 그를 오라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깨끗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 일을 했습니다."
네가 깨끗한 마음으로 이 일을 한 줄 나도 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막아 나에게 죄를 짓지 않게 했다. 네가 그 여자를 건드리지 못하게 한 것이 그 때문이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예언자다.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하면 네가 살 것이다. 하지만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너에게 딸린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죽을 줄 알아라.
해설 성경에서 "예언자(선지자)"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곳이 여기다. 예언자는 앞일을 맞히는 사람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기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한 아브라함을 통해 아비멜렉을 살리시겠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택하셨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왕궁이 술렁였다. 아비멜렉이 신하들을 다 불러 꿈 이야기를 했고, 그들은 하얗게 질렸다. 그 무렵 왕궁 여자들 가운데 아이를 가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여호와께서 나 때문에 아비멜렉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던 것이다. 그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그제야 알았다.
나는 남편이 불려 오는 것을 보았다.
"당신이 어찌 우리에게 이럴 수 있소? 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나와 내 나라를 이 큰 죄에 빠뜨릴 뻔했소? 당신은 해서는 안 될 일을 내게 했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소?"
남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내 아내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정말 내 누이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릅니다. 그러다 내 아내가 되었지요. 하나님이 나를 아버지 집에서 떠나 떠돌게 하실 때, 내가 아내에게 부탁했습니다. 어디를 가든 나를 오라버니라고 해 달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다고.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 앞에서 떤 사람은 이방 왕이었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남편의 굽은 등을 보았다. 미웠다. 그리고 불쌍했다.
아비멜렉은 양과 소, 남종과 여종을 남편에게 주고 나를 돌려보냈다. "내 땅이 당신 앞에 있으니 마음에 드는 곳 어디서든 사시오."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 오라버니에게 은 천 개를 주었소. 그것으로 당신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당신의 명예가 지켜졌소. 당신 일은 다 바르게 풀렸소."
오라버니라는 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얼굴이 뜨거웠다.
남편이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들을 고쳐 주셔서 그들이 다시 아이를 낳게 되었다. 나 때문에 닫혔던 태가 남편의 기도로 열렸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찾아오셨다. 말씀하신 대로 나에게 행하셨다.
배가 불러 오는 것을 처음 느낀 날을 기억한다. 나는 장막 구석에 혼자 앉아 두 손을 배 위에 올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평생을 기다렸다. 웃음이 터져 나올까 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번에는 숨길 이유가 없는 웃음이었는데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때, 나는 아들을 낳았다. 남편은 백 살이었다. 남편은 아이 이름을 이삭이라 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이름이었다. 여드레째 되던 날,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아이에게 할례를 행했다.
나는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다. 이 소식을 듣는 사람마다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 그리고 또 말했다. "사라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될 거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이나 했겠나. 그런데 내가 늙은 남편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장막 뒤에서 몰래 웃던 늙은 여자가 이제는 온 동네 앞에서 웃었다.
아이가 자라 젖을 떼던 날, 남편은 큰 잔치를 열었다.
그날 나는 보았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 이제는 다 큰 소년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에서 앞날을 보았다. 남편이 죽은 뒤 이 장막에서 벌어질 일을.
나는 남편에게 갔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세요. 저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유산을 받을 수 없어요."
남편의 얼굴이 굳었다. 그 아이도 그의 아들이었다. 열네 해 동안 하나뿐이던 아들. 그는 그날 밤 장막 밖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 밤 하나님이 남편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아이와 여종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라. 사라가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주어라. 이삭에게서 난 사람이라야 너의 자손이라 불릴 것이다. 하지만 여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해설 신약의 바울은 이 장면을 비유로 풀어 설명한다(갈 4:22-31).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은 사람의 계획으로 난 아들이고, 사라의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아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이나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로 된다는 것이다(롬 9:7-8).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내보내진 이스마엘을 버리지 않고 돌보셨다.
아침 일찍 남편은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어 주고 아이와 함께 떠나보냈다. 나는 장막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지 않았다.
그 뒤의 일은 훗날 들었다. 하갈은 브엘세바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졌다. 하갈은 아이를 덤불 아래 눕히고, 화살 한 번 날아갈 만큼 떨어져 마주 앉았다. "아이가 죽는 걸 차마 못 보겠어." 그리고 소리 내어 울었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갈을 불렀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꼭 붙들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여시자 샘이 보였다. 하갈은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 아이에게 먹였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하셨다. 아이는 자라 광야에서 살며 활 잘 쏘는 사람이 되었고, 바란 광야에 살 때 그 어머니가 애굽 여자를 데려와 아내로 삼게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한참 말이 없었다. 내가 내쫓은 아이의 울음을 하나님이 들으셨다. 나는 그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그 무렵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남편을 찾아왔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는구려. 그러니 여기서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해 주시오.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를 속이지 않겠다고. 내가 당신에게 잘해 준 것처럼 당신도 나와 당신이 머무는 이 땅에 잘해 주시오."
"맹세하겠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자리에서 따질 것이 있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리가 판 우물을 빼앗았던 것이다. 아비멜렉이 말했다. "누가 그랬는지 나는 모르오. 당신도 말하지 않았고, 나도 오늘에야 처음 들었소."
남편은 양과 소를 아비멜렉에게 주고 둘이 언약을 맺었다. 그리고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떼어 놓았다.
"이 일곱 마리는 왜 따로 두시오?"
"이 일곱 마리를 내 손에서 받으십시오. 이 우물을 내가 팠다는 증거로."
두 사람은 거기서 맹세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이 브엘세바, 맹세의 우물이 되었다. 아비멜렉과 비골은 블레셋 땅으로 돌아갔다.
해설 비가 귀한 그 땅에서 우물은 사람과 가축의 목숨줄이었고, 우물을 판 사람이 그 둘레 땅을 쓸 권리를 가졌다. 그래서 우물을 빼앗는 것은 큰 다툼거리였다. 히브리 말 "세바"는 "일곱"과 "맹세"를 함께 떠올리게 하는 말이어서, 일곱 마리 암양으로 맹세한 이곳이 브엘세바가 되었다.
남편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블레셋 땅에서 오래 살았다. 이삭은 그 나무 그늘에서 자랐다.
나는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며 날마다 웃었다. 그 아이가 언젠가 아버지와 단둘이 산에 오르게 될 줄은 모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