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창조와 족장 · 창세기 17-18장
제14장 할례와 세 나그네
가나안 땅 남쪽, 헤브론 근처 마므레.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을 떠난 지 스물네 해가 지났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내 사래는 끝내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사래의 여종 하갈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고, 그 아이가 벌써 열세 살이 되었다.
이 장은 아브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때 그는 아흔아홉 살이다.
이 장의 사람들: 아브람→아브라함(화자, 이 장에서 새 이름을 받음), 사래→사라(아브라함의 아내), 이스마엘(하갈이 낳은 아브라함의 아들, 열세 살), 세 나그네(마므레에 찾아온 손님, 한 분은 여호와), 롯(아브라함의 조카, 소돔에 삶)
이스마엘이 열세 살이 되던 해, 나는 아흔아홉이었다.
그동안 나는 이스마엘을 보며 살았다. 아이는 들판을 좋아했다. 아침에 나가면 해가 져야 돌아왔고, 돌아올 때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 몸에서 날 아들이 이 아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했다.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아흔아홉 살이 되던 해, 그분이 나타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며 흠 없이 행해라. 내가 너와 언약을 맺고, 너를 아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이마에 닿은 흙이 차가웠다.
보아라, 내가 너와 언약을 맺는다.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를 아브람이라 부르지 않고 아브라함이라 부르겠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해서 네게서 나라들이 나오고 왕들이 나오게 하겠다. 내가 이 언약을 나와 너, 그리고 대대로 이어질 네 후손 사이에 영원한 언약으로 세운다.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네가 지금 나그네로 사는 이 땅, 가나안 온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땅으로 주겠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 많은 무리의 아버지. 아들 하나를 아내에게서 얻지 못한 늙은이가 받은 이름이었다. 장막으로 돌아가 이 이름을 말하면 종들이 뭐라고 할지,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해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 주시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길을 갈지 새로 정해 주신다는 뜻이다.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아들 하나 없는 노인에게 하나님은 약속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 약속을 이름에 담아 날마다 불리게 하셨다. 사래도 이때 "왕족 여인"이라는 뜻의 사라라는 이름을 받는다.
그러니 너는 내 언약을 지켜라. 네 후손도 대대로 지켜야 한다. 너희 가운데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라. 몸의 끝 살갗을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시다. 대대로 너희 남자 아이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집에서 난 종이든, 다른 민족에게서 돈을 주고 산 종이든 다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 언약이 너희 몸에 새겨져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는 내 언약을 깬 사람이니, 백성 가운데서 끊어질 것이다.
해설 할례는 남자 몸의 끝 살갗을 베어 내는 의식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시로 몸에 새기게 하셨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할례는 그 믿음을 확인하는 도장이었다고 말한다(롬 4:11). 신약은 몸보다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된 할례라고 가르친다(롬 2:29, 골 2:11).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 부르지 말고 사라라고 불러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서, 그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겠다. 민족들의 왕들이 그에게서 나올 것이다.
나는 엎드린 채 웃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속으로 계산을 했다. 내가 백 살, 사라가 아흔. 그 나이에 아이를 낳는 사람이 어디 있나.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 다른 마음이 따라 나왔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잘 살기를 바랍니다."
이미 있는 아들로 만족하겠다는 말이었다. 더 바라지 않을 테니 그 아이를 받아 달라는 말이었다.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반드시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해라. 나는 그와 내 언약을 세워, 그 뒤에 올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겠다.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네 말을 들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자손이 많아지고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그는 열두 지도자를 낳을 것이고, 나는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 그러나 내 언약은 내년 이맘때 사라가 너에게 낳아 줄 이삭과 세우겠다.
이삭. 그가 웃는다는 뜻이다. 내가 웃은 그 웃음을 하나님은 아이 이름으로 돌려주셨다.
말씀을 마치시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 올라가셨다.
나는 그날 바로 했다. 하루를 넘기면 망설일 것 같았다.
이스마엘을 불렀다. 집에서 난 종들, 돈 주고 사 온 종들, 내 집의 남자란 남자는 다 불러 모았다. 나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내 얼굴을 보고 묻지 못했을 것이다.
칼을 쥔 손이 떨렸다. 아흔아홉 살의 손이었다. 나부터 받았다. 그다음이 열세 살 이스마엘이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의 머리를 오래 쓰다듬었다. 언약은 이 아이와 세우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이 아이는 그 언약의 표시를 몸에 받았다.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우리 집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다.
그 뒤 어느 날, 한낮이었다.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그늘도 소용없을 만큼 더웠다. 나는 장막 입구에 앉아 있었다. 눈을 들었는데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었다. 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냥 거기 있었다.
나는 일어나 달려 나갔다. 땅에 엎드려 절했다.
"내 주여, 제가 은혜를 입었다면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올 테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십시오. 빵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기운을 차리신 뒤에 가십시오. 이렇게 종에게 오셨으니까요."
"그래, 네 말대로 하자."
나는 장막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보, 빨리.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반죽해서 빵을 구워요." 그리고 소 떼에게 달려가 연하고 좋은 송아지를 골라 젊은 종에게 넘겼다. 종이 서둘러 잡았다. 나는 버터와 우유, 구운 고기를 차려 나무 아래 그들 앞에 놓고 곁에 서 있었다. 그들이 먹었다.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
나는 멈칫했다. 사라. 그 이름은 하나님께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름이었다. 나그네가 알 리 없는 이름이었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분이 말씀하셨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오겠다. 그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등 뒤 장막 입구에서 짧은 웃음이 났다. 사라였다.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여자의 때가 끊어졌다. 나중에 아내가 말했다. 그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고.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늙었는데, 나에게 무슨 그런 기쁨이 있겠나.
사라가 왜 웃으면서 '내가 늙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겠나' 하느냐? 여호와가 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 정한 때에, 내년 이맘때 내가 너에게 돌아오겠다. 그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아내가 장막에서 나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그 말씀에는 노여움이 없었다. 그저 사실이었다. 나는 아내를 보았다.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웃었다. 나는 엎드려서, 아내는 장막 뒤에서. 그리고 하나님은 그 웃음을 둘 다 들으셨다.
해설 이 세 사람 가운데 한 분은 여호와 자신이셨다. 성경은 이 장면 처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적고, 셋 중 한 분을 계속 "여호와"라고 부른다. 나머지 둘은 다음 장에서 소돔에 이르는 천사들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와 음식을 함께 드신 이 일은, 훗날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이 되어 오실 일을 미리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들이 일어나 소돔 쪽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배웅하러 함께 걸었다. 언덕 위에서 소돔 평지가 멀리 보였다. 조카 롯이 거기 살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고, 세상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내가 그를 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집안 사람들에게 명해서 여호와의 길을 지켜 옳고 바른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이룰 수 있다.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울부짖는 소리가 크고, 그들의 죄가 아주 무겁다.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들이 한 짓이 정말 나에게 들려온 울부짖음과 같은지 아닌지 보고 알아보겠다.
해설 하나님이 "내려가서 알아보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모르셔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소문만 듣고 서둘러 심판하지 않으시고 공정하게 살피신다는 것을 사람의 말로 보여 주신 표현이다. 그리고 그 뜻을 아브라함에게 먼저 알려 주셔서 그가 기도할 자리를 열어 주셨다.
두 사람은 소돔으로 걸어갔다. 나는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성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그곳을 멸하시겠습니까? 그 쉰 명을 위해서 용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시는 일은 절대 안 됩니다. 의인과 악인을 똑같이 대하시는 일은 절대 안 됩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 공정하게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하고 나서 숨이 찼다. 내가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소돔 성 안에서 의인 쉰 명을 찾으면, 그들을 보아서 그 땅 전체를 용서하겠다.
"저는 티끌과 재에 지나지 않는데, 감히 주께 말씀드립니다. 쉰에서 다섯이 모자라면, 그 다섯 때문에 성 전체를 멸하시겠습니까?"
마흔다섯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다.
"마흔 명이면요?"
마흔 명을 보아서 멸하지 않겠다.
"주여, 노하지 마시고 말하게 해 주십시오. 서른 명이면요?"
서른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다.
"감히 또 말씀드립니다. 스무 명이면요?"
스무 명을 보아서 멸하지 않겠다.
"주여, 노하지 마십시오. 이번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열 명이면요?"
열 명을 보아서도 멸하지 않겠다.
나는 거기서 멈추었다. 더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열 명. 롯과 그 아내, 두 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 그 성에 열 명쯤은 있을 것이다. 있어야 했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마치고 떠나셨다. 나는 내 장막으로 돌아왔다. 소돔 쪽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날이 밝으면 그 언덕에 다시 올라가 볼 생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