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창조와 족장 · 창세기 14장
제12장 왕들의 전쟁과 멜기세덱
가나안 남쪽 산지의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나무 숲. 아브람은 조카 롯과 갈라선 뒤 이곳에 장막을 치고 살았다. 롯은 동쪽 요단 들판의 소돔 성 가까이로 옮겨 갔다. 그 무렵 동쪽 먼 나라 왕들이 사해(성경의 "염해") 근처 다섯 성읍을 십이 년 동안 다스리며 조공을 받고 있었다. 동쪽 왕들의 땅은 지금의 이라크와 이란 서남쪽, 소돔과 고모라는 사해 근처에 있던 성읍이다.
이 장은 아브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온 지 몇 해가 지난, 아직 자식 없는 나그네다.
이 장의 사람들: 아브람(화자, 헤브론에 사는 나그네), 사래(아브람의 아내), 롯(아브람의 조카, 소돔에 삶), 마므레, 에스골, 아넬(아브람과 손잡은 아모리 사람 형제들), 그돌라오멜(엘람 왕, 동쪽 네 왕의 우두머리), 멜기세덱(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소돔 왕(베라)
그 무렵은 조용했다. 양들은 새끼를 낳았고, 마므레 형제들과 나는 우물을 함께 쓰며 사이좋게 지냈다. 롯의 소식은 가끔 장사꾼들에게서 들었다. 소돔 성 안에 집을 얻어 산다고 했다. 장막을 걷고 성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동쪽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헤브론 산지까지 올라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들 말했다.
그 사람은 해 질 녘에 왔다. 신발 한 짝이 없었고, 발등이 피로 말라붙어 있었다. 마므레 형제들의 목자들이 그를 내 장막으로 데려왔다. 물을 주자 반을 쏟고 반을 마셨다.
"싯딤 골짜기에서 도망쳐 왔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야기했다.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과 소알, 이 다섯 성읍의 왕들은 열두 해 동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겼다. 열세 번째 해에 등을 돌렸다. 그리고 열네 번째 해에 그돌라오멜이 왔다. 시날 왕 아므라벨, 엘라살 왕 아리옥, 고임 왕 디달과 함께.
"오는 길에 있는 족속은 다 쳤습니다. 아스드롯 가르나임의 르바 족속, 함의 수스 족속, 사웨 기랴다임의 엠 족속, 세일 산의 호리 족속을 치고 광야 끝 엘바란까지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돌아서서 가데스로 올라와 아말렉 땅을 다 치고, 하사손다말의 아모리 족속까지 쳤습니다."
다섯 왕이 싯딤 골짜기, 지금은 소금 바다가 된 그곳에 나가 진을 쳤다. 다섯이 넷을 상대했다. 그런데 그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았다. 끈적한 검은 진흙 구덩이들.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 군사들이 거기에 빠졌고, 남은 자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네 왕은 소돔과 고모라의 재물과 먹을 것을 모조리 실어 갔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를 똑바로 보았다.
"소돔에 살던 주인님의 조카 롯도 잡혀갔습니다. 그의 재산까지 다 빼앗겼습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자지 않았다.
롯은 자기 눈에 좋은 땅을 골라 갔다. 나를 두고. 그가 소돔 쪽으로 장막을 옮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가 사슬에 묶여 북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동쪽 왕들은 다섯 왕의 군대를 무너뜨린 자들이었다. 나는 군대가 없었다. 목자들과 종들이 있을 뿐이었다.
사래가 장막 입구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그 말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롯은 그녀에게도 조카였다. 나는 등잔불 아래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손바닥이 땀에 젖었다. 나는 목자였지 장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을 내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셨다. 그분이 그 말씀을 하신 땅에서, 내 핏줄이 끌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내 집에서 태어나 내 집에서 자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불러 세웠다. 활과 칼을 쓸 줄 아는 자들. 삼백열여덟 명. 마므레와 그 형제 에스골과 아넬도 나섰다. 그들은 나와 손을 잡은 아모리 사람들이었다.
새벽에 떠났다. 쫓는 길은 멀었다. 남쪽 헤브론에서 북쪽 끝 단까지. 길가에 버려진 수레바퀴, 짐승 똥, 꺼진 모닥불 자국이 그들이 지나간 길을 알려 주었다. 그들은 이긴 군대였다. 느긋했다. 우리는 쉬지 않았다.
길 위에서 나는 자주 하늘을 보았다.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을. 별을 볼 때마다 그분의 약속이 떠올랐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겠다. 그 약속이 참이라면 나는 여기서 죽지 않는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며 걸었다. 발바닥이 갈라지고 종들의 입술이 하얗게 텄다. 누구도 돌아가자고 하지 않았다.
단에서 그들을 따라잡았다. 나는 사람들을 몇 무리로 나누었다. 밤을 기다렸다. 어둠이 짙어졌을 때 우리는 여러 방향에서 한꺼번에 덮쳤다. 잠에서 깬 적들은 우리가 몇 명인지 몰랐다. 그들은 무너졌다. 우리는 다메섹 북쪽 호바까지 그들을 쫓았다.
그 밤은 소리로 남았다. 짐승들이 놀라 울부짖는 소리, 천막 줄이 끊어지는 소리, 낯선 말로 외치는 소리. 그리고 내 숨소리. 날이 밝았을 때 우리 쪽 사람들은 거의 다 서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내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삼백열여덟 명이 네 왕의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되찾았다. 빼앗긴 재물, 끌려간 여자들과 사람들. 그리고 롯. 횃불 아래서 본 그의 얼굴은 흙투성이였다. 그는 나를 보고 한참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도 그랬다. 그의 어깨를 한 번 잡았을 뿐이다.
돌아오는 길, 사웨 골짜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왕의 골짜기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소돔 왕 베라가 나와 나를 맞았다. 싯딤 골짜기에서 달아나 살아남은 왕이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내 앞에 섰다. 살렘 왕 멜기세덱. 그는 무기를 들지 않았다. 떡과 포도주를 들고 왔다. 지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이 땅에서 나 말고도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 있었다. 왕이면서 제사장인 사람이.
그가 손을 들어 나를 축복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그대의 원수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넘겨주신 분. 그는 이 승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민 떡을 받아 먹었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앉아서 먹는 음식이었다. 포도주가 목을 적셨다. 사람들이 하나둘 땅에 주저앉아 떡을 나누었다. 왕이 가져온 떡을 종들이 먹고 있었다.
나는 되찾은 물건 가운데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아깝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해설 성경에서 십일조(얻은 것의 십분의 일)가 처음 나오는 곳이 여기다. 아브람은 승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그것을 드렸다. 성경은 멜기세덱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갔는지 말하지 않는다. 훗날 시편 110편은 오실 메시아를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라 부르고, 히브리서 7장은 이 말씀을 예수님에게 적용한다.
소돔 왕이 다가왔다. 그는 손을 비비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게 돌려주고, 물건은 그대가 가지시오."
후한 말이었다. 이긴 자가 다 가져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나는 소돔을 알았다. 그리고 방금 멜기세덱의 말을 들었다.
"나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손을 들어 맹세하오. 당신 것이라면 실 한 오라기나 신발 끈 하나도 갖지 않겠소. 당신이 나중에 '내가 아브람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오. 다만 젊은이들이 먹은 것은 빼 주시오. 그리고 나와 함께 간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에게는 그들 몫을 주시오. 그들은 그들 몫을 가져가야 하오."
해설 멜기세덱이 부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참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아브람은 같은 이름에 "여호와"를 붙여, 자기가 섬기는 여호와가 바로 그분이심을 밝혔다. 손을 들어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고 약속한다는 뜻이다. 아브람은 소돔 왕의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 받겠다고 한 것이다.
소돔 왕은 대꾸하지 않았다. 롯은 그 왕 곁에 서 있었다. 헤어지기 전 롯이 내게 다가와 고맙다고 했다. 목이 메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함께 마므레로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소돔은 네가 살 곳이 아니라고. 그러나 그는 이제 제 집과 제 사람들이 있는 어른이었다. 그는 소돔 왕의 무리와 함께 소돔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뒷모습이 골짜기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나는 빈손으로 헤브론에 돌아왔다. 사래가 장막 앞까지 뛰어나왔다. 그녀는 내 얼굴과 손과 발을 차례로 살폈다. 다친 데가 없는 것을 보고서야 숨을 내쉬었다. 롯은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내 얼굴을 보고 알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다 살아 돌아왔고, 롯도 살았다. 그런데 밤이 되면 귓가에 그 밤의 함성이 다시 들렸다. 네 왕은 물러갔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그들이 다시 올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자식이 없었다. 내 뒤에 남을 사람이 없었다.
장막 밖 바람 소리에도 눈이 떠지던 어느 밤, 그분이 나를 부르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