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창조와 족장 · 창세기 12-13장

제11장 떠나라

하란. 지금의 튀르키예 남동쪽, 시리아 국경 가까이 있던 장사꾼들의 도시다. 노아의 아들 셈의 자손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며느리 사래, 먼저 죽은 아들의 아들인 손자 롯을 데리고 고향 갈대아 우르(지금의 이라크 남부 큰 도시)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다가 이곳에 머물러 살았고, 하란에서 눈을 감았다. 가나안은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땅이다.

이 장은 데라의 아들 아브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아내 사래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는, 일흔다섯 살의 남자다.

이 장의 사람들: 아브람(화자, 데라의 아들), 사래(아브람의 아내, 아이가 없음), 롯(아브람의 조카, 죽은 형 하란의 아들), 바로(애굽의 왕)

그 음성은 바람 소리처럼 오지 않았다. 사람의 말처럼 분명했다. 하란에 머물던 내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 세 겹으로 둘러싸인 내 삶을 하나씩 벗고 나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보여 줄 땅. 그게 전부였다.

큰 민족이라니. 나는 자식이 없었다.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우리 장막 안에서 아이 울음이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내게 큰 민족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온 땅의 민족이 나 때문에 복을 받는다고. 나 하나에서 끝나는 말씀이 아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해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뜻은 아브람 한 사람이 잘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두고, 신약의 바울은 하나님이 이때 이미 복음을 미리 전하셨다고 말한다(갈 3:8). 아브람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올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떠났다. 사래와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그곳에서 얻은 사람들을 모두 이끌고. 짐을 싣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나는 일흔다섯이었고, 사래는 나보다 열 살 아래였다.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아버지가 묻힌 곳에 한 번 더 갔다. 아버지도 가나안으로 가려 했었다. 그러나 하란에 멈추었고, 거기서 끝났다. 나는 무덤 앞에서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오래 서 있으면 나도 멈출 것 같았다. 롯이 짐승 고삐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형 하란이 남긴 아들. 아버지를 일찍 잃은 그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어 제 짐승과 제 종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나를 따라나선 것이 나는 고마웠다.


우리는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내려갔다. 강을 건너고 광야를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섰다.

세겜 땅, 모레의 큰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까지 갔다. 그늘이 넓었다. 그런데 그 땅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가나안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우물, 그들의 밭, 그들의 성읍. 나는 나그네였다. 이 땅 어디에도 내 것은 없었다.

그곳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나타나셨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

자손. 나는 사래를 돌아보았다. 사래도 나를 보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돌을 모아 단을 쌓았다.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 땅에 처음으로 내 손으로 놓은 돌이었다.

해설 단은 제단이다. 돌이나 흙을 쌓아 그 위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던 자리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했다는 뜻이다. 다른 신들의 제단이 가득한 땅에서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아 자기가 누구를 섬기는 사람인지 드러냈다.

근처 성읍의 가나안 사람들이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았다. 낯선 무리가 와서 돌을 쌓고 보이지 않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이 그들에게는 이상했을 것이다. 그들의 언덕마다 그들의 신들을 위한 제단이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썼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지로 옮겨 장막을 쳤다. 서쪽으로는 벧엘이, 동쪽으로는 아이 성이 내려다보였다. 거기서도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조금씩 남쪽 네겝 땅으로 옮겨 갔다.


비가 오지 않았다.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풀이 말랐고 양들이 야위었다. 우물 바닥이 드러났다. 그 땅에 기근이 심했다.

애굽에는 큰 강이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아도 강이 넘쳐 땅을 적시는 나라. 나는 사람들과 짐승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잠시 머물다 올 생각이었다. 여호와께 묻지는 않았다.

애굽 국경이 가까워 왔을 때 나는 사래를 불렀다. 그 말을 꺼내기까지 며칠 밤을 뒤척였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참 아름다운 여인이오. 애굽 사람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가 저 사람의 아내로구나' 하고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거요. 그러니 부탁이오. 내 누이라고 해 주시오. 그러면 당신 덕분에 내가 무사하고, 내 목숨도 살 수 있을 거요."

반은 사실이었다. 사래는 내 아버지의 딸이었다. 어머니가 달랐을 뿐. 그러나 반만 사실인 말은 거짓말이었다. 사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보지 않았다.

애굽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눈이 사래에게 쏠렸다. 바로의 신하들까지 그녀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했다. 바로는 애굽의 왕이었다. 어느 날 궁에서 사람들이 와서 사래를 데려갔다. 나는 막지 않았다. 누이라고 했으니 막을 수도 없었다.

그 뒤로 선물이 들어왔다. 양과 소, 수나귀와 암나귀, 남종과 여종, 낙타. 바로가 사래 때문에 나를 후하게 대접했다. 우리 장막 앞에 짐승이 늘어 갈수록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내를 내주고 받은 값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래 일 때문에 바로와 그의 집안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성 안이 술렁였다. 바로는 곧 까닭을 알아냈다. 나를 불러들였다.

"네가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느냐? 어찌하여 그 여자가 네 아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누이라고 해서 내가 그 여자를 아내로 데려오게 했느냐? 자, 네 아내가 여기 있다. 데리고 가거라."

이방 왕에게 꾸중을 들었다. 그는 옳았고 나는 옳지 않았다. 바로는 신하들에게 명령해 나와 아내와 내 모든 소유를 국경까지 내보냈다. 사래가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나를 지킨 것은 내 거짓말이 아니었다.

해설 성경은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허물도 감추지 않고 그대로 적는다. 사래는 실제로 아브람의 이복누이였지만(창 20:12), 아내라는 사실을 숨긴 것은 사람들을 속인 일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려고 사래를 지켜 내셨다.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의 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에 사래는 한동안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밤에 모닥불 건너편에 앉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삼켰다. 나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근 앞에서, 낯선 나라 앞에서, 나는 그 약속을 잊고 내 꾀를 믿었다. 그 대가를 치른 것은 내가 아니라 사래였다.


우리는 애굽에서 나와 다시 네겝으로 올라갔다. 롯도 함께였다. 나는 짐승도 많고 은과 금도 많은 부자가 되어 있었다. 남쪽에서부터 길을 거슬러 벧엘까지 갔다.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을 쳤던 곳. 처음 단을 쌓았던 그 자리였다. 나는 거기서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갈 곳은 거기밖에 없었다.

롯에게도 양과 소와 장막이 많았다. 그 땅이 우리 둘을 다 감당할 수 없었다. 풀밭과 우물을 두고 내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날마다 다투었다.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살고 있었다. 그들이 다 보고 있었다.

나는 롯을 불러 언덕 위로 올라갔다.

"우리는 한 핏줄이다. 너와 나 사이에, 내 목자들과 네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게 하자. 온 땅이 네 앞에 있지 않으냐. 나를 떠나 따로 가거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판을 바라보았다. 소알까지 온 들판에 물이 넉넉했다. 여호와의 동산 같았고, 우리가 막 다녀온 애굽 땅 같았다.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다. 롯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요단 들판 전체를 골라 동쪽으로 옮겨 갔다.

롯이 짐을 꾸리던 날, 나는 그의 장막 앞을 몇 번 지나갔다.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고르라고 한 것은 나였다. 그는 떠나면서 한 번 손을 들었다. 나도 손을 들었다. 그의 짐승 떼가 일으킨 먼지가 오래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갈라섰다. 나는 가나안 땅에 남았고, 롯은 들판의 성읍들 사이에서 살다가 장막을 소돔 가까이까지 옮겼다. 소돔 사람들은 악했다. 여호와 앞에 큰 죄인들이었다.


롯이 떠난 뒤 언덕에 혼자 서 있었다. 남은 것은 돌과 덤불뿐인 산지였다. 그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내가 네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겠다. 누가 땅의 티끌을 셀 수 있다면 네 자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가로로 걸어 보아라.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겠다.

나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흙먼지. 셀 수 없는 티끌. 롯은 좋은 땅을 골라 갔고, 하나님은 내게 온 땅을 주셨다.

나는 장막을 걷어 헤브론으로 옮겼다.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에 자리를 잡고, 거기서도 여호와께 단을 쌓았다.

그때는 몰랐다. 소돔으로 간 롯 때문에 내가 칼을 들게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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